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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와일드 번치 - 길들여 지지 않은 자들의 폭력

by 유래유거 2020. 12. 19.

‘와일드(wild)’란 말은 보통 인간에 의해 길들여 지지 않은 동물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우리 말로는 ‘야생’이란 말로 번역되지만 단어가 좀 문어체처럼 들려서인지 ‘야생마’를 제외하고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친근하게 ‘들’이나 ‘산’자를 붙이는 경우가 더 많다. ‘들고양이’, ‘들개’, ‘산토끼’, ‘산양’ 등과 같이

이 ‘와일드’란 수식어가 가축화 되지 않은, 길들여 지지 않은 동물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처럼 ‘인간’에 대해서도 문명이나 사회 규범에 익숙치 않은 기질 또는 부류를 지칭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와일드 번치’에 등장하는 패잔병 강도단이 바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다. 제도나 법률 또는 관습이라는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필요하다면 법이든 관습이든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공권력이 응징해 온다면 목숨을 내놓고 맞서 싸울 준비 또한 되어 있는 자들이다. 

법치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일개 ‘무법자’ 무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은 부당함에 항거한다는 나름의 정당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회에 길들여 지거나 거기 적응하는 정도를 하나의 기준으로 볼때 사회화의 정도에 따라 이 영화 속에는 네 부류의 인간형이 등장한다. 

첫째는 권력을 가진 자, 제도권의 주인이라 할수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다. 영화 밖 현실에서는 주로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영화속에서는 재력을 가진 은행가와 군사력을 가진 멕시코 군벌의 장군이 여기에 속하며 이들은 길들여지는 게 아니라 길들이는 쪽에 속한다.

권력이 없는 자들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 착취를 당하게 된다. 착취 당하는 자들 중 일부는 권력에 순응하고 그들의 존재를 거부할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한마디로 인간이 더 강한 인간에 의해 길들여 지는 것이다. 현상금을 위해 은행가에게 고용된 추격대나 멕시코의 독재자에게 복종하고 있는 군사들이 두번째 유형의 인간들이다. 이 유형을 편의상 ‘개의 무리’라고 불러 보자.

세번째는 ‘개의 무리’와 대조되는 인간형으로 ‘늑대의 무리’라 불릴수 있는 자들이다. 권력도 돈도 없고 빈털터리에 남은 건 악밖에 없는 패잔병 무리지만 제도권 밑으로 기어들어 가서 개가 될 생각은 없는 ‘와일드 번치’의 주인공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네번째는 개도 늑대도 아니며 그렇다고 권력가도 아닌 존재,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군상들이다. 과거에는 늑대 무리에 있었으나 이젠 개 무리에 속해서 늑대 사냥을 지휘하는 사내 딕 소튼이 바로 네 번째 유형의 인간이다. 늑대 시절의 향수때문인지 소튼은 늑대의 무리를 그리워 하고 개의 무리에 대해선 경멸을 가진다. 소튼이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인 윌리엄에게 품는 감정은 동경과 부러움, 그리고 윌리엄의 거침 없는 행동과 대조되는 자신의 초라하고 유약한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등장인물을 유형별로 분류해 놓으니까 얼추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구성이 되는 듯 하다. 아마 영화를 안 본 사람도 전개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 참여해 열심히 싸웠지만 패잔병이라는 불명예와 무일푼이라는 훈장을 얻게 된 노병들은 은행을 털기로 결심한다. 자신들의 희생에 대한 응당한 보상이라고 여긴 것이다. 돈을 털린 은행가는 총잡이 건달들을 모집해서 추격에 나선다. 

과거 갱단의 일원이었고 현재는 안락한 생활과 자유로운 영혼을 교환한 딕 소튼은 아직도 늑대의 우두머리로 있는 친구 윌리엄에 대한 동경과 자신을 따르는 개 무리들에 대한 혐오를 품은 채로 추격을 지휘한다. 

한편 은행털이로 은퇴자금을 모으는데 실패한 윌리엄 패거리는 좌절과 분노를 찔끔 느끼고 껄껄 대며 다시 한탕을 모의 한다. 와일드 패거리인 만큼 매우 쿨하다.

지역 군벌 마파치와 작당해 무기를 탈취하는데 성공하지만 동료인 앤젤이 마파치에 항거하자 다섯 밖에 안 되는 늑대들은 무장한 부대 병력과 맞서겠다는 무모한 결단을 ‘그들답게’ 내리게 되고 결국 마파치는 처단했지만 자신들 또한 몰살 당하고 만다. 

와일드한 사내들은 전원 죽음을 맞지만 그들의 모습은 통쾌함을 준다. 행동 하나하나가 마초적이이어서 망설이거나 꾸물됨이 없고 그때그때의 감정적 결단을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단순함과 명료함에 매료되는 인간의 특성상 이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적인 폭력 속에 살아 가지만 그들이 행하는 폭력은 약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가학적인 쾌감을 이유로 하지도 않는다. 권력자들에게 나름대로의 명분을 가지고 대적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 있는 폭력인 것이다. 

한편 추격대의 모습은 어떠한가? 힘 있는 자들의 전횡에 대해 분노는 하지만 항거는 못 한다. 오히려 그들이 던져주는 몇푼 안되는 돈을 주워들고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면서 곧장 술집으로 달려가 독한 술을 마셔댄다. 그러고는 쌓인 증오와 불만을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찾아 가학적인 폭력과 함께 해소한다.

‘와일드하다’라는 건 길들여지 않는 것, 결국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고 권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가진다.

이 와일드한 패거리는 억압받는 삶보다는 투쟁을 택했고 그 결과로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겉으로 보기엔 강도단의 비참한 말로 그 이상은 아닌 걸로 보일수도 있지만 불의에 항거한다는 면에서 이들의 삶과 죽음 모두가 숭고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고 그렇기때문에 이들의 폭력은 아름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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